[이재명의 웹자서전] ep.7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석 달 치 밀린 월급을 받기로 한 날이었다. 

달뜬 마음으로 평소처럼 4킬로미터를 걸어 창곡동 목걸이 공장으로 출근했다.


하지만 공장문이 닫혀 있었다. 상황 파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장이 직원들 월급을 떼먹고 야반도주를 한 것이었다.


밤 9시가 넘어 퇴근 하던 길을 벌건 대낮에 터덜터덜 걸어 돌아왔다. 

하루 12시간, 90일치의 노동이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요즘처럼 신고해 도움 받을 길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열세 살, 취업연령 미달에 이름도 남의 이름을 빌려 다니던 중이었다.


“엄마!”

엄마는 집에서 부업으로 북어포를 찢고 있었다. 

엄마를 보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솟구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억울함이 몰려왔다.


놀란 엄마가 뛰어나와 나를 안으며 토닥였지만 내 울음은 오히려 더 커졌다. 

이제 돌아보건데 아마도 엄마가 더 아프고 억울하고 슬펐을 것이다.


다시 동마고무라는 콘덴서용 고무부품 공장에 취업했다. 

모터로 회전하는 샌드페이퍼 연마기에 사출기로 찍어낸 고무기판을 갈아내는 일이었다. 

소위 ‘빼빠’치는 것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손바닥이 닳고 지문이 사라지더니 피가 흘러나왔다.


야근은 밤 10시, 철야는 새벽 2시. 

철야 하는 날이면 통금시간 때문에 새벽 4시까지 공장바닥에서 자다가 귀가했다. 

통금해제까지 잠이 안 오면 노래를 배우거나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때웠다.

그때 강원도 출신 꼬마노동자(그는 놀랍게도 나보다도 나이가 어렸는데 지금은 이름을 잊어버렸다)에게 

배운 최초의 최신 유행가가 하남석의 ‘밤에 떠난 여인'이다.


하루는 연마기에 손가락이 말려들어갔다. 

부실한 치료 덕에 내 왼쪽 중지 손톱에는 지금도 검은 고무가루가 남아 있다. 

산업재해로 치료받는 기간에는 월급의 70%를 준다는 법 같은 건 알지도 못했고 회사에서도 그럴 마음은 전혀 없었다.


월급을 받기 위해 왼손에 깁스를 한 채로 공장에 나가서 남은 한 손으로 일했다. 

한손으로 일하는데도 월급을 다 준다는 것이 오히려 고마웠다.


“재명아, 깁스 푼 다음에 나가라. 손이 남아나질 않겠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말리지 못했고 대신 나와 출퇴근길을 동행하는 것으로 안타까움을 대신했다. 

밤늦은 시간까지 공중화장실에서 일하다가 공장으로 데리러 왔고, 철야 하는 날이면 새벽 4시에 데리러 왔다. 

그건 가진 것도 힘도 없는 엄마가 어린 아들에게 준 최고의 사랑이었다.


세상이 모두 잠든 새벽에 엄마와 둘이 상대원동 비탈길을 오르면 숨도 차고 힘들었지만,

잡은 엄마 손을 발걸음에 맞춰 신명나게 흔들며 나는 행복했다. 

엄마와 함께라면 길고 긴 하루의 고된 노동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 손은 언제나 따뜻했다.


섣달그믐날처럼 차가운 삶을 견디게 하는 것은 그런 온기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이재명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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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인간 이재명> (아시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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